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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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언어의 무한한 변주
단문으로 이뤄진 시인의 시들은 “모두의 이름을 부르면서/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다”(「인간의 교실」)라는 시구처럼 모순된 상황들을 충돌하게 함으로써, 사건이 진척되고 시간이 흐르는 것을 철저히 끊어낸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김종훈은 최정진의 시편들이 “매 순간 무엇을 선택하고 배제할지” 결정해야 하는 ‘현재’라는 시점을 반복적으로 독자 앞에 부려놓는다고 말한다. 이율배반처럼 보이는 진술을 통해 최정진은 독자를 ‘최초의 순간’으로 거듭 데려온다. 과거나 미래와의 연결 고리를 끊고 되풀이되는 현재의 자리로 독자를 초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은 그 자리에서 무엇을 보았으며 그의 시를 읽는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이 책의 총서 (467)
작가정보
목차
- 1부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 /인간의 교실 /기시감이라는 설명서 /축제의 인상 /인공과 호흡 /외출 /외출 /모든 것의 근처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 /밸브 /인공과 호수 /인과 /많은 믿음 /조경사 /햇볕에 비춰진 먼지가 빛나고 있었다
2부
풍경의 표현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 /가상의 침묵 /필체의 뇌 /호수의 공원 /눈사람이 어는 동안 /문구文具 /인간의 가벽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 /방향
3부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생동 /설명의 마음 /풍경의 표현 /고통의 영상 /바람 없는 추위 /모드 /미스트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 /미간의 희망 /옥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해설 김종훈 어두운 기도의 형상
■ 뒤표지 글
쌓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눈을 쓸고 있다
■ 시인의 말
빛이 사각의 격자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정은에게
2020년 2월
최정진
책 속으로
정교하게 조정돼 있으니 손대지 마세요 수도관에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안내문이 물에 젖어 읽을 수 없었는데 한참을 쳐다보았다
다음 계절에 작은 화분들을 정돈하다가 수도관에 새롭게 붙은 안내문을 보았다 같은 말이 다르게 적혀 있었다
안내문에 물이 번져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데 나는 읽고 있게 된다
-「햇볕에 비춰진 먼지가 빛나고 있었다」 부분
우리는 아무도 태우지 않고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처럼
이미 이곳에 들어와 있다
모두의 이름을 부르면서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다
이곳은 고통의 원인을 네게서 찾지 않는 세계다
-「인간의 교실」 부분
자동차의 설명서를 읽는다 설명서에는 이것이 우리의 생존에 필요하다고 적혀 있다
한가운데 제품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언어가 그림의 명칭과 목적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물에 잠기면 수명이 짧아진다고 적혀 있다
상상해본 작동법이 모두 설명서에 적혀 있었다 숲은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인다
-「기시감이라는 설명서」 부분
출판사 서평
‘부른다’라는 사건의 발생
전모를 알 수 없는 흐릿한 형상
‘내’가 ‘너’를 부른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쉽게 ‘너’를 부르는 ‘나’의 얼굴도, ‘내’가 부르는 ‘너’의 얼굴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총 아홉 번에 걸쳐 등장하는 제목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이라는 구문에서 독자는 ‘나’ 혹은 ‘너’라는 존재를 빠르게 떠올릴 수 없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 것일까. 그 누군가를 찾는 누구는 또 어떤 이란 말인가.
누군가 대답을 한다
누군가 둘러본다
[……]
아무도 없는 데서
아무도 없다고 누군가 대답을 한다
-「고통의 영상」 부분
네가 사라지기 전에도
너는 없었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
아무도 너를 부르지 않았다는 말이
마치 그것이 내가 하려던 말인 것처럼
-「모든 것의 근처」 부분
누군가 주위를 둘러보고 또 누군가 그에 대답을 하는 시적 공간이 있다. 그런데 그 공간엔 아무도 없다. 누군가 있었던 공간이었던 것도 아니다. “네가 사라지기 전에도” 너는 없었던, 빈 공간일 뿐이다. 누군가를 부르는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사실 부른 사람도, 불린 사람도 불명확하다는 것이 이 시집의 공간성이다. 이 모순된 공간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즉, 부른 사람을 찾는 ‘얼굴’은 사실 텅 빈 기표에 가까운 것이자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뚫린 구멍에 가까운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구워지지 않는 쿠키의 타는 냄새
모순된 시공간 주변을 맴도는 언어
시인이 ‘부른다’라는 사건에 관해 반복적으로 쓴 것은 아마도 ‘부른다’는 행위가 가지는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선 우리에게 특정한 대상이 필요하다. 그 대상은 과거에도 있었을 테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명확한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너는 누군가 쿠키를 구워 선물한다면 거절하겠다고 한다
[……]
쿠키는 구워지지 않는데
쿠키 타는 냄새가 공원을 맴돌고 있고
너는 쿠키를 구울 반죽을 해야 한다고 중얼거린다
-「인간의 가벽」 부분
획일하게 진행되는 시간, 축적되는 시간이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시간이라면, 최정진의 시에선 그 개념이 달라진다. “누군가 쿠키를 구워 선물한다면” 너는 그 쿠키를 거절할 생각이다. 거절을 하기 위해선 쿠키가 구워지고 있다는 것이 전제일 테지만, 그다음 시인은 곧바로 “쿠키가 구워지지 않”는다며 전제를 부정한다. 굽지도 않았는데 “쿠키 타는 냄새”는 또 무엇인가. 구워지지도 않은 쿠키의 타는 냄새가 맴도는 공원에서 시적 화자는 “쿠키를 구울 반죽을 해야 한다고 중얼거린다”. 결국 시간은 공원을 맴도는 냄새처럼 돌고 돌아 반죽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쿠키를 굽는 시간, 쿠키가 타는 시간, 쿠키를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시간으로 넘어가지 못한 채 반죽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렇게 최정진의 시에서 시간은 “축적된 시간을 지닌 여느 시와 달리 홀로 동떨어진”(김종훈 문학평론가) 것으로 현재에 머문다.
다시 한번 ‘부른다’라는 사건에 대한 애기를 해보자. ‘부른다’는 것은 흐르는 시간 위에서, 과거에서 미래까지 쭉 진행되는 곳에서 가능한 개념일 것이다. 반복적으로 현재로 복귀하는 시간, 부른 사람도 불린 사람도 특정할 수 없는 시공간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닌 것이다. 최정진 시집의 시공간은 결국 ‘부른다’라는 서술어의 대상이 되는 언어를 명확히 지시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한 모습으로 대상의 주위를 맴돈다. 마치 구워지지 않은 쿠키 타는 냄새처럼 말이다. 진리에 다가서는 시가 아니라 “중심을 향하되 그 근처에” 머물며 “모든 것의 근처를 제 시의 터전”(김종훈)으로 삼는 시가 바로 최정진의 시가 놓이는 바로 그 장소다.
기본정보
ISBN | 9788932036090 |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02월 17일 | ||
쪽수 | 91쪽 | ||
크기 |
130 * 205
* 8
mm
/ 140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문학과지성 시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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