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중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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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들이 모여 만든 문학동인 ‘송석원시사’는 조선 후기 서민문학을 이끌었으며 역관시인 홍세태와 ‘달마도’를 그린 김명국은 일본에 한류열풍을 일으킨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중인의 전방위 재능과 비범함은 예술 분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중인은 열린 사고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문화 메신저의 역할, 과학적 사고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온몸으로 실천한 신지식인의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성리학의 탁상공론에 빠져 정쟁만을 일삼던 사대부도 실천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사회적 영향력을 키워가는 중인 계층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몇몇 왕과 사대부는 중인의 재능과 실천적 사고를 높게 평가하며 측근에 두고 교류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로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 등이 있지만 중인에 재능에 대한 신뢰는 양반뿐 아니라 왕이나 왕족에게서도 엿볼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정조이다. 정조는 서얼 출신 지식인을 등용하여 그들과 함께 신학문을 연구하며 문예부흥의 초석을 쌓았다.
작가정보
저자 허경진은 피난 시절 목포에서 태어났다. 돌도 되기 전에 인천으로 올라와 학교를 다녔지만, 기억에도 없는 목포를 고향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고교 시절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시를 썼고 ‘요나서’라는 시로 연세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 고서실에 쌓인 한시 문집들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한시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대학원 전공도 한문학으로 바꾸면서, 한시를 읽고 외우고 해석하는 일로 이십대를 보냈다. 한시의 매력에 빠지면서 그가 자연스럽게 하게 된 일은, 한시를 우리말로 쉽게 풀어내는 것이다. 당시 창작과비평사나 문학과지성사에서 현대시인선집을 총서로 출간하는 것을 보고, ‘한국의 한시’라는 시리즈를 기획·집필하였다. 1986년에 시작된 ‘한국의 한시’ 시리즈는 최치원에서 황현에 이르기까지 50권이 나왔다. 앞으로 100권을 채우겠다는 것이 그의 꿈이다.
요즘 그는 한시 연구 외에도 고전문학 전반에 걸쳐 선조들의 삶과 문학 활동을 연결하는 공부에 한창이다. 이미 대전과 충남지역의 누정문학 연구서를 냈고,『한국의 읍성』이란 사진집도 냈다. 또 조선시대 사대부의 문학 인생을 다룬『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과 당시 문인들의 어린 시절 글공부를 소재로 재미있게 쓴 『한시 이야기』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 외『손암 정약전 시문집』『조선평민열전』『허균 평전』『서유견문』『삼국유사』『청소년을 위한 연암 박지원 소설집』『주해 천자문』등의 책을 냈으며, 이 밖에도 외국 도서관에 소장된 우리나라 고서를 다룬『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의 한국 고서들』과『시경』에 나오는 식물을 고증·해설한『시명다식』(공역)은 인문 탐서가의 필독서로 꼽힌다. 요즘은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활동 중이다.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를 거쳐, 지금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목차
- 책머리에 /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바로 중인이 꿈꾸던 시대
1. 인왕산 굽이진 기슭에서 시처럼 산 문학동인
중인들의 터전, 한양 인왕산
인왕산을 노래한 시문학동인 ‘송석원시사’
겸재 정선이 즐겨 그리던 필운대와 육각현
검서관 유득공 부자의 필운대 풍월
인생을 함께한 ‘벽오사’ 동인
김홍도 그림으로 표지를 꾸민 중인들의 시화집
가난한 중인들의 시선집을 펴낸 홍세태
180년에 걸쳐 출판된 중인들의 시선집
조선 후기 최고의 출판편집인 장혼
장혼이 한평생 설계한 행복한 집 ‘이이엄’
별나게 살았던 중인들의 전기집 《호산외기》
명필 마성린의 자서전에 담긴 중인의 한평생 유흥
중인 지식인이 꿈꾼 인왕산 공동체
2. 세상의 우여곡절을 그리고 노래한 예술인
신필(神筆)의 화원 김명국(1)
신필(神筆)의 화원 김명국(2)
왕실의 광대가 되기를 거부한 최북
이용후생의 화가 변박
직업적인 화가이기를 거부한 조희룡
조선 최고의 골동 서화 수집가 오경석
우리나라 서화를 집대성한 오세창
인왕산 호걸지사의 맹주, 가객 박효관
한양의 유흥가를 누빈 군악대 용호영의 리더 이패두
3. 계급의 질곡에 맞서 시대를 끌어안은 전문지식인
침술의 대가 허임
신의(神醫)라 불린 백광현
고약 처방으로 종6품까지 오른 피재길
전염병 마마로부터 왕실을 구한 유상
새로운 해시계를 만든 천문인 김영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기자 오세창
중인 통청 운동에 앞장선 율관 장지완
청렴강직한 호조 아전 김수팽
진정한 호인(好人) 임준원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천재 국수(國手) 유찬홍
예배 장소를 제공한 첫 번째 순교자 김범우
천주교의 지도층으로 활약한 중인들
4. 대륙과 바다를 넘나들며 신세계를 꿈꾼 역관
17·18세기 한류를 일으킨 역관시인 홍세태
요절한 천재 역관 이언진
통신사 최고의 무예사절 마상재
조선 장교 최천종 살인 사건
나라의 운명을 바꾼 홍순언
열두 차례나 중국을 오간 이상적
양요를 경고한 오경석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 변수
136수의 시로 신세계를 묘사한 김득련
실용 회화 책으로 일본어를 배운 왜학 역관
개화기의 역관 양성소, 외국어학교
역관의 수난사_외국어 교육과 험난한 뱃길
왕비(장희빈)까지 배출한 역관 부자 인동 장씨
조선 최고의 갑부 변승업과 그 후손
부록 / 조선시대 중인의 수와 사회적 지위
한양에 중인은 얼마나 살았을까
양반에 60년 뒤진 중인의 신분
책 속으로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사람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므로 좁은 골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인 계금 이하였다. 중인을 위항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살았던 거처에 기인한다. 한양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면 그 중간 지대인 청계천 일대가 위항이었다. 좁은 집이 모여 있던 누상동(樓上洞)·누하동(樓下洞)을 중심으로 한 인왕산 일대도 위항이었다.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에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재산이 넉넉한 중인들이 살았으며, 인왕산 언저리에는 주로 서리나 아전이 살았다. -15쪽
“재주가 있고 없는 것은 내게 달렸으며, 그 재주를 쓰지 않는 것은 남에게 달렸다. 나는 내게 달린 것을 할 뿐이다. 어찌 남에게 달린 것 때문에 궁하고 통하며 기뻐하고 슬퍼하다가, 내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그만둘 수 있으랴?” 중인 이하에게 벼슬길을 제한하는 사회제도 때문에 슬퍼할 게 아니라 타고난 천기와 글재주를 맘껏 발휘하라는 충고이자, 사대부 문단에 대한 선언이었다. 홍세태의 천기론은 후대에 더욱 발전하여 위항시인들이 방대한 분량의 시선집을 출판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62쪽
서른이 되기 전에「평생지」를 써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을 설계했던 장혼은 자기 뜻대로 세 칸 집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의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으므로 남들은 그가 가진 것 없음을 비웃었지만” 그 자신은 69세 되던 해 입춘절에 “굶주림과 배부름, 추위와 더위, 죽음과 삶, 재앙과 복은 운명을 따르면 그만이다”라고 자부한 뒤,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83쪽
김명국은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재주가 나오지 않았고, 취하면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취하고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 그려야 했는데, 그런 상태에서 그린 그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김명국의 그림에는 걸작도 많지만 실패작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남태응은 그런 이유가 술 때문만은 아니라 중인이라는 신분 때문이기도 하다고 변명했다. 국부(國富)라고까지 불렸던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 윤두서는 양반인 데다 갑부였기에 재물이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이 내킬 때에만 그림을 그렸으며, 그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들어야만 남에게 보여 주었다. 그랬기에 하나같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중인 김명국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116~117쪽
중인 후배인 조희룡은 최북이 한쪽 눈을 보지 못하게 된 사연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어떤 높은 벼슬아치가 최북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요구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를 위협하려고 했다. 그러나 최북이 노하여 말했다.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게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 그러면서 곧바로 눈을 찔러서 애꾸가 되었다. 늙은 뒤에는 돋보기안경을 한쪽만 끼었다. 나이 마흔아홉에 죽으니, 사람들이 칠칠의 참(讒)이라고 하였다. -132쪽
10만 석 거부의 상속자인 전형필이 1929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골동 서화를 수집하며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것이나, 역시 일본 대학에 유학했던 오봉빈이 1929년에 광화문 당주동에서 신구(新舊) 서화 전시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조선미술관을 개설한 것은 모두 오세창의 권고와 지도 덕분이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고서화 명품 가운데 상당수는 오세창의 감정과 평가를 거쳐 수집되었다고 한다. -162쪽
1793년 여름에 정조의 머리에 부스럼이 생겼다. 여러 가지 침과 약을 써 보았지만 오랫동안 낫지 않았다. (…) 피재길은 미천한 신분이었으므로 임금 앞에서 떨며 땀만 흘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좌우에 있던 여러 의원과 신하가 모두 속으로 비웃었다. 정조가 가까이 다가와 진찰하게 하였다. “두려워 말고 네 솜씨를 다하라.” 그러자 피재길이 말했다. “신에게 한 가지 처방이 있는데, 이 증상에 써 볼 만합니다.” (…) 정조가 “며칠이면 낫겠느냐?”고 묻자, “하루면 통증이 멎고, 사흘이면 다 나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사흘 뒤에 정말 다 나았다. -196~197쪽
김수팽이 어느 날 서류를 결재 받으려고 판서의 집으로 찾아갔더니, 판서는 마침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김수팽이 결재해 달라고 청했지만, 판서는 머리만 끄덕일 뿐 여전히 바둑만 두었다. 수팽이 섬돌에 뛰어올라가 손으로 바둑판을 쓸어 버리고, 뜰로 내려와 아뢰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랏일은 늦출 수가 없으니, 저를 파직시키고 다른 아전을 시켜서 결재하시기 바랍니다.” -236쪽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임준원을 따르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넉넉한 마음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올곧음 때문이었다. 하루는 그가 육조거리 앞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자가 관리에게 구박받고 있었다. 불량배 하나가
출판사 서평
문·사·철을 뛰어넘는 전방위 재능으로
조선의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주도한 중인(中人) 다큐멘터리
지금으로 말하면 의료(의원), 법률(율관), 금융(계사), 외교(역관), 천문지리(음양과), 미술(화원), 음악(악공), 문학(시인) 등 전문지식 분야와 예술 및 문화 전방위에서 활약한 중인이 없었더라면 정조도, 조선도 없었다.
중인은 양반과 평민 사이에 있는 중간 계층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대부에 훨씬 미치지 못하면서 평민이나 심지어 천민에게도 존중받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그럼에도 중인 가운데는 문·사·철을 뛰어넘는 비범함으로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주도했던 지식인이 여럿 있었다.
중인들이 모여 만든 문학동인 ‘송석원시사’는 조선 후기 서민문학을 이끌었고 역관시인 홍세태와 「달마도」를 그린 김명국은 일본에 한류 열풍을 일으킨 예술가였다.
출판에 평생을 바친 장혼은 중국의 『천자문』을 대신할 교과서 『아희원람』,『계몽편』을 편찬하였고, 고약전문가 피재길은 부스럼으로 잠 못 이루던 정조를 사흘 만에 완치시켜 종6품까지 올랐다. 의원 허임과 백광현은 신기에 가까운 침술로 수많은 백성을 살렸고, 역관 변수는 조선인 최초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사였다. 바둑천재 유찬홍은 대적할 자 없던 불패의 국수國手였으며, 민족신문 ‘만세보’를 발행한 오세창은 조선의 1세대 신문기자였다.
계층의 벽을 디딤돌 삼아
조선의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실학자 이중환은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서론인 ‘사민총론’에서 백성을 사(士)·농(農)·공(工)·상(商) 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옛날에는 사대부가 따로 없었고, 모두 백성(民)이었다. 백성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선비가 어질고 덕이 있으면 임금이 벼슬을 시켰고, 벼슬하지 못한 자는 농사를 짓거나 장인(匠人)이 되거나 장사꾼이 되었다.
즉, 이중환은 사·농·공·상을 신분으로 보지 않고 직업으로 보면서, “사대부라고 하여 농·공·상을 업신여기거나 농·공·상이 되었다고 사대부를 부러워한다면, 이는 모두 근본을 모르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중환의 이러한 논지는 당시 신분 차별이 매우 심각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특히 사·농·공·상으로 나눈 이중환의 분류 어디에도 중인이 속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흔히 ‘반쪽 양반’이라 불리는 서얼은 육조(六曹)와 삼사(三司) 등의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었기에, 대부분 역관·의원·율관·산관·화원 등의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 관리인 경아전과 서리에 종사했다. 서얼 출신이 기술직 관원이나 하급 행정 관리가 되면 그 후손들도 대를 이어 하급 관리에 진출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서얼 출신의 관리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워 고관으로 승진하여 양반 신분을 얻기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하급 관리로라도 가계를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들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신분층을 형성하게 되면서 중인 계급을 이루게 된 것이다.
중인은 왕의 주치의인 어의, 도화서 화원,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을 통역하는 역관, 호조와 형조에 근무하는 서리와 율관 등 왕실 및 조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생활 터전도 궁궐 근처에 있어야 했다. 따라서 많은 중인들이 궁궐 뒤 인왕산 기슭 굽이진 골짜기나 청개천 일대의 좁은 골목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중인을 위항인(委巷人)이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 가운데 꼬불꼬불한(委) 작은 길가(巷)에 사는 사람(人)'이라는 뜻으로, 그들의 거처에 따른 것이다.
정조의 르네상스를 만든 건
사대부가 아니라 중인이었다
중인은 비록 왕실과 사대부 양반을 보좌하거나 나라의 한직을 채우는 인물로 취급받았지만, 그들의 일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실로 대단했다. 중인은 특히 자신들이 살았던 인왕산을 배경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예술적 활동을 꽃피웠다. 수려한 경관으로 한양 최고의 명승지로 꼽히던 인왕산은 신분 차별과 격무에 지친 중인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중인은 인왕산 기슭에 그들만의 서재를 꾸미고 그곳에서 문학동인이자 문화공동체인 시사(詩社)를 결성하여, 시를 지으며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문학이 중인을 문화공동체로 결집시킨 과외 활동이었다면, 그림과 음악은 그들의 대표적인 직업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화원은 국내보다도 일본에서의 활약이 대단했는데, ‘달마도’로 유명한 신필(神筆) 김명국은 역관시인 홍세태와 함께 일본에 한류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당시 일본인은 조선의 문장가나 화원의 시와 그림에 광적으로 매료되었는데, 조선통신사 사절단으로 방문한 문장가와 화원은 가는 곳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국빈 대접을 받았다. 당시의 화원 가운데는 돈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붓끝을 곧추세웠던 최북 같은 인물도 있었다. 그는 그림을 강요하는 양반 고관에 맞서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가며 권력과 타협하지 않은 대쪽 같은 예술가였다.
중인의 전방위 재능과 비범함은 예술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들은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열린 사고로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는 문화 메신저였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염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 용기 있는 히포크라테스였으며, 과학적 사고로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온몸으로 실천한 신지식인이었다. 성리학의 탁상공론에 빠져 정쟁만을 일삼던 사대부도 실천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사회적 영향력이 커져가는 중인 계층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몇몇 왕과 사대부는 중인의 비범한 재능과 실천적 사고를 높게 여기며 측근에 두고 교류하기도 하였다.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중인과 교류가 깊었던 양반 선각자이다. 서얼 출신 검서관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추사는, 송석원시사의 좌장 천수경의 부탁으로 1미터가 넘는 화폭에 예서체로 ‘松石園’ 석 자를 써 주기도 했다. 추사는 또한 역관 오경석, 이상적, 화원 조희룡을 제자로 삼으며 친하게 지냈는데, 1840년경 제주도 유배지에 찾아온 이상적에게 그의 최고 걸작 ‘세한도’를 그려주기도 했다.
연암 박지원 역시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양반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실제로 연암의 소설에는 중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허생전’에서 가난한 양반 허생에게 밑천을 대준 변씨는 중인 출신 갑부 변승업의 조부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연암은 요절한 천재 역관 이언적의 전기 ‘우상전’을 짓기도 했다.
중인의 재능에 대한 신뢰는 양반뿐 아니라 왕이나 왕족에게서도 엿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조이다. 정조는 당시 서얼금고법으로 인해 중인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규장각에서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하는 검서관직을 신설하여 서얼 출신 지식인을 등용하였다. 1779년에 임명된 초대 검서관이 바로 유득공·이덕무·박제가·서이수 네 사람이다. 당대에 가장 명망 있는 중인 출신인 이 네 명의 학자를 ‘4검서’라 불렀는데, 정조는 이들과 함께 신학문을 연구하면서 문예부흥의 초석을 쌓았다.
중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왕족 가운데는 뜻밖에도 흥선대원군이 있다. 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권력층을 견제하기 위해 아전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면서 수많은 중인 서리를 사조직으로 흡수하는, 이른바 ‘아전정치’를 폈다. 대원군은 중인을 정치적 야욕에 이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중인 출신 관리들의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중인 출신 서리 말고도 박효관, 안민영 등의 음악인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인왕산 필운대에 ‘운애산방’이라는 공간을 마련해주며 가객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이 밖에도 영조, 다산 정약용, 번암 채제공, 구암 허준, 겸재 정선 등 당대 최고의 인물 곁에는 항상 중인이 있었다. “인재는 인재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시대를 이끈 주인공의 눈에는 또 다른 주인공이 들어왔던 것이다.
철저한 문헌 해석에 근거하여 풀어낸 최초의 ‘중인실록’
최근 출판에서는 물론이고, 영화나 방송 등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인물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심심찮게 발생되는 역사 왜곡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주인공으로 재배치된 인물의 삶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한 고증의 오류, 흥미유발을 위한 상업적 코드에 매몰되어, 치정(痴情)화 되거나 변질되고 만다. 결국 역사에 대한 다양성의 욕구가 지나쳐 역사 본연의 진실이 왜곡되어 버리는 것이다.
《조선의 중인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면서 역사 콘텐츠의 지나친 상업적 코드화를 탈피한 역사 다큐멘터리를 지향한다. 이 책은 문헌의 철저한 해석에 근거하여 다양한 역사적 지층을 하나하나 고증해 역사 본연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풀어낸다. 문헌에 나와 있는 역사적 기록을 그대로 풀어내더라도 중인의 삶은 충분히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재배치나 인위적 창작을 가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고전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저자 허경진 교수는, 조선 후기 위항문학을 연구하면서 수집한 수많은 중인 관련 기록과 문헌을 바탕으로, 이 책을 엮어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많은 기록을 부지런히 찾아내어 정확하게 해석하고 냉정하게 고증하는 것이 역사적 글쓰기의 본령임을 제시한 것이다. 독자들은 그 어떤 재배치나 왜곡 없는, 사실 그대로의 역사 콘텐츠를 지향한 이 책의 텍스트 만으로도 인문적 소양은 물론, 중인의 곡진(曲盡)한 삶에 배어있는 드라마틱한 재미와 감동까지 충분히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25555836 |
---|---|
발행(출시)일자 | 2015년 03월 31일 |
쪽수 | 400쪽 |
크기 |
152 * 215
* 30
mm
/ 682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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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이상 ‘다운로드’를 받았거나 '바로보기'로 열람한 경우
6)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7)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8) 세트상품 일부만 반품 불가 (필요시 세트상품 반품 후 낱권 재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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